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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록은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남겼던 첫 번째 작업일지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는 기록이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낡은 노트 한 권을 펼쳐본다. 공간 박스를 쌓아둔 허름한 책장에는 먼지가 쌓여있다. 지난 몇 개월은 건드리지 않은 듯하다. 노트의 지질은 그다지 좋지 않다. 펼쳐진 무선의 지면 위로 작은 글씨에서 큰 글씨. 다양한 컬러로 다양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기록을 남겼는지 모르겠다. 무선이라 글줄도 없고 대부분 사선으로 쓰여있다.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을 틈틈이 이 노트에 기록했다. 일기장과는 다르다. 내 개인적인 감상보다도 작업 진행에 대한 기록이 주를 이룬다. 이 두껍고 낡은 노트는 나에게 있어서 작업일지라는 개념의 시작점이다. 그 이전에 이정표라는 개념의 기록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이 기록들을 묻어두기 보다는 기억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따로 정리하고 싶었기에. 지금 노트와 노트북을 펼쳤다. 


낡은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 2012.04 - ZESS TYPE WORK BOOK.
    이제 어느덧 2013년 4월이 지나가고 있구나. 」



180 x 180 mm 에 두께는 45mm. 이 투박한 노트는 본래 내가 대학생 때 아이디어 스케치를 위한 노트였다.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기에 제대로 쓰지는 않았지만. 하긴 생각해보면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메모가 가능하고. 전공 수업은 USB 하나만 달랑 들고 다녔으니깐. 아무튼 직장에 들어가고서 노트가 필요했기에 이 노트를 선택했다. 내지는 앞 쪽 수십 페이지의 찢어진 흔적이 있다. 깔끔하게 칼로 자르면 될 것을. 귀찮아서 손으로 뜯었던 모양이다. 분명 이 노트를 구매했을 대학생 때는 아이디어 스케치로 이 노트를 가득 채우겠노라 생각했겠지만. 그 열정은 고작 수십 페이지에 그쳤다. 먼저 보이는 기록은 '작업의 대주제이자 큰 흐름. 한글.'을 시작으로 한글에 대한 기록들이 눈에 띈다. 헨리데이빗소로우와 버나드쇼 그리고 기형도의 글귀 혹은 격언도 보인다. 몇 줄의 초심 타령도 눈에 들어온다. 물론 이런 잡다한 기록보다는 당시 진행하고 있던 작업에 대한 기록들이 주를 이룬다. 


난잡한 기록들을 찬찬히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읽고 나서 처음 드는 생각은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면서 기록해 두었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당시 이 기록의 어떤 의미나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단지 기록하는 행위 자체를 통해서 나 자신을 안정시키고. 사고를 발전시켰었다. 다시 보니 영 부끄럽지만. 몇 줄의 기록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더 많은 행동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작업들을 해야 한다.
더 이상 나태하게 굴지 말고.
조금 더 착실하게 성실하게.
성실함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위해 강요된 것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성실함이. 절실함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남을 탓하지 말자.
스스로 더 분발하자.
지고 나서 남 탓하는 것만큼
없어 보이는 것도 없더라.



이 기록들을 보자니. 당시 막 입사한 신입 디자이너에게 저러한 것들을 요구했던 것 같다. 성실. 착실. 절실. 남 탓은 하지 말고. 흘려듣지 않고 기록으로 옮겨 놓은 것을 보면 어지간히 저런 소리를 들었겠는가. 작업일지에 작업에 대한 고민들과 과정에 대한 기록들이 빽빽하다 못해 알아볼 수가 없다. 아마도 나는 2012년 4월 첫 직장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구나. 이 기록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물론 기억에도 남아있지만. 그 당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 아무튼. 대부분의 신입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열정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그 열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노트를 덮고 그 당시를 떠올려본다. 4년 전.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4개월 정도는 별생각 없이 살고 있었다.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직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이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지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당시 디자인 일을 재택 아르바이트로 구해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별 대책도 없이 큰 꿈을 키우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끝까지 직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도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살고 있거나. 혹은 부모님이 계신 제주도로 소환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도 철 없이 구는 자식을 부모님이 그냥 두었겠는가. 결국은 한 소리 듣고 구직을 시작했다. 어디 보자. 배운 게 디자인이니 디자인 회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규모가 큰 회사는 사람이 많아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남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은데. 내 위에 수백 명이나 있다면 돌아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조그마한 회사로. 업무는 그래픽 디자인. 만일 지금 다시 첫 직장을 선택하라면 나는 분명 더 많은 것을 고려하겠지만. 당시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취직은 그저 월급을 받기 위한 것이었고. 기업의 가치나 추구하는 방향. 복지 같은 것은 별로 생각지 않았다. 


마침 딱. 지원 마감이 이틀 남은 회사가 있었다. 업무는 한글 그래픽 디자인. 그리고 한국적인 그래픽 디자인. 회사 자체는 제품 디자인 회사였지만. 업무도. 규모도. 위치도 집에서 가까웠고.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서 하루 종일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지원했다. 아마 새벽 5시쯤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서 이메일로 지원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 전화가 왔다. 당시 나는 철저히 야행성이었다. 해가 지면 일어나고 해가 뜨면 잠이 드는. 아침에 걸려온 전화를 잠결에 받았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화는 면접 일정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주 금요일에 면접을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구직 활동이었고 면접도 처음이었지만 안되면 다른 회사 찾아보면 되지 뭐. 스스로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 편하게 찾아가서 막힘 없이.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면접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되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로 출근하라고. 그렇게 내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열명 남짓한 규모로 디자이너는 나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있었는데. 다들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신입이었다. 남자 둘에 여자 둘. 아마도 일부러 성비를 맞췄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직장과 새로운 동료들. 그 낯선 환경 속에서 나는 그저 할 일이 있으면 일에 집중하고. 일을 다하면 칼 같이 퇴근했다. 한 달 정도. 직장 생활하던 동안 가장 좋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그 후로는 칼퇴근이 거의 연중행사였으니 말이다. 그 시점의 기록은 이렇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당시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것인가.



그래픽 디자인은 무엇인가.
패키지 디자인은 무엇인가.
제품 디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디자인은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다시 보면 새롭고 또다시 보면 그래도 새로운 것을 디자인해야 한다.

이 대목이야 말로 기가 막힌다. 분명 내가 생각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런 어마어마한 발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누군가가 얘기해줬겠지. 당시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이 재미없는 것인가.
디자인이 재미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사는 게 재미없는 것인가.

후... 



고작 한 달 정도 일하고서 남긴 기록들을 보자니. 사회의 떼가 묻지 않은 여린 내 멘탈이 안쓰럽다. 바로 뒷 페이지에 쓰인 '멘탈 재부팅'이라는 글도. 3년간의 혹독한 직장생활을 톨해 강철 같은 멘탈을 얻은 지금.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일들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마저도 버티기 힘들었다. 열정 페이를 받으며 열정을 불사르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첫 직장은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가혹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수많은 부푼 꿈들을 잊어버렸고. 현실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실현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큰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아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지에 대한. 세 번째 이정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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